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문단 편집) === 왕명으로 시작된 피의 숙청 === 이후, 간신히 평화를 되찾았던 가톨릭 세력과 위그노 세력간의 알력 다툼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위그노 세력의 귀족들이 카트린이 점심식사를 하는 도중 쳐들어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파리의 가톨릭 신자들은 위그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카트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강경 가톨릭 세력의 중심이었던 기즈 가문의 가주 기즈 공작 앙리와 야심가인 왕제 앙주 공작 앙리가 가세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기즈 공작 앙리는 콜리니와 콩데 공작 루이[* 원래 부르봉 가문의 가주로 나바르의 앙리의 숙부였다. 당시에는 이미 전투 과정에서 전사했다.]의 사주로 의해서 아버지가 암살당한 원한이 있었다. 그래서 기즈 공작 왕리는 '''"이번 기회에 아버지의 원수도 척결하고 눈에 거슬리는 위그노들을 싹 쓸어버리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기즈 공작 앙리 때문에 목표는 콜리니 한 명에서 파리의 모든 신교도 대학살로 바뀌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CharlesIX.jpg|width=100%]]}}}|| || [[1572년]], 샤를 9세 || 8월 24일, 결국 샤를 9세는 콜리니와 위그노 지도자들을 숙청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당시까지는 국왕의 권위가 어느 정도 유지되어 기즈 공작 앙리도 스스로 그 정도의 일을 벌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즈 공작의 위세가 왕을 능가하는 것은 앙리 3세 후기, 파리 가톨릭들의 지지를 업은 뒤의 일이다. 단,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일의 배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있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배후로 [[바티칸]]이 떠올랐다. 이에 대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사죄를 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가톨릭 교회가 그러한 학살을 옹호하고 정당화했다는 것에 대한 사과이지 주도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이 문제로 가톨릭 보수파들이 격분하기도 했다.][* 원래 샤를 9세는 건장한 육체에 승마와 사냥을 즐겼으나, 외가인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비롯된 유전성 폐결핵으로 평생 고통스러워했고, 충동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곧잘하여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즈 공작 앙리는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콜리니의 저택을 들이쳐 그를 살해했다. 가톨릭을 믿는 파리 시민들이 이에 호응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위그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국왕의 [[스위스 근위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밤, 프랑스 전국에 걸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위그노인 수천 명이 [[가톨릭]]인들에게 학살당했다. 또한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며 어린아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가톨릭 교도들 역시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얼마 전 나바르의 여왕인 어머니 [[호아나 3세]](잔 달브레)가 승하하면서, 나바르 왕 헨리케 3세로 등극한 새신랑 나바르의 앙리는 아내 마르그리트[*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로 [[샤를 9세]] 및 [[앙리 3세]]의 여동생.]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를 비롯해 헨리케 3세의 사촌인 콩데 공작 앙리[* 선대 콩데 공작 루이의 아들.]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대학살에 대해 보고받고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기는 했지만 [[광신도|결과적으로는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하며, 바티칸에서도 대대적으로 축포]]가 터졌다고 한다. 교황은 또한 화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지시해 궁을 대학살에 대한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도록 했다. 정확한 위치는 살라 레지아(Sala Regia) 홀로, 바티칸 [[사도 궁전]] 내에 있다. 옆에는 [[레판토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바사리가 그린 그림도 있다. 이 홀은 교황을 알현하는 등의 공식 행사 때만 열리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교황이라는 작자는 학살의 날을 축하하여 ‘하느님께 찬미’란 뜻의 성가인 [[암브로시우스]] 사은찬미가 <테 데움>(Te Deum)을 부를 것을 명령했고 특별 감사 미사까지 집전했으며, 위그노 대학살을 기념하기 위해 이 날을 축제일과 희년으로 정하고 모두가 이것을 지켰으며 기념주화까지 제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666blog.com/1-2-4-1.jpg|width=100%]]}}}|| || 1572년 위그노 학살 '''기념'''주화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